"결혼도 못해 보고 28살에 세상 떠난 제 딸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써주세요."
지난 2003년 1월, 아주대병원 유전학클리닉에 근무하고 있던 김현주(69·여)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산에 사는 장모(58)씨라고 밝힌 그는 딸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김 교수는 장씨에게 부산에 있는 병원에 시신을 제공하라고 권했다.
장씨는 그러나 "김 교수가 우리나라 희귀병 대모(大母)라고 하던데, 꼭 제 딸 시신 보고 연구해주십시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딸의 사인은 ''''척추신경성 실조증''''으로 청소년기엔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20~40대부터 소뇌가 위축되면서 처음엔 어지럽고 비틀거리는 증상이 반복되는 병이다. 일단 증세가 나타나면 몸의 마비가 진행돼 결국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는 유전성 희귀병이다. 이 병은 대를 이어 유전될수록 증세가 빠르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으로 아버지 장씨 역시 딸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딸의 시신을 마주하고 김 교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키가 160㎝ 정도인 20대 여성의 시신은 너무 말라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가슴과 등에는 욕창이 심했다.
김 교수는 "오랜 시간 고통받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의 시신을 마주하니, 내가 필요하다고 울부짖는 이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자리잡았다"고 했다. 3년 뒤 아버지 장씨 역시 딸과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장씨의 시신도 아주대병원에 기증했다.
- 한국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은 국내 희귀질환의 대모로 불리며 40여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관련 연구를 계속해왔다. /한국희귀질환재단 제공
2007년 8월 아주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김 교수는 3년여의 준비 끝에 지난 6월 29일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 ''''한국희귀질환재단''''을 설립했다. 희귀질환이란 정확한 진단이 어렵고 효율적 치료제가 없는 혈우병·고셔병·실조증·윌슨병 등 6000여 종의 난치성 만성 질환을 말한다. 대부분 유전병인 것이 특징이다. 희귀질환재단은 이 같은 희귀질환 환자들을 후원하는 순수 공익재단으로 2001년 아주대병원에 설립됐던 한국희귀질환연맹이 모체가 됐다. 재단에서는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의 유전상담 서비스 지원을 중심으로 치료 연구 지원, 특수 보육 및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재단의 중심 업무인 유전상담은 희귀병의 유전 가능성과 치료제나 의학정보 등 질병 대처법 등을 상담과 검사를 통해 환자와 가족들에 알려주는 것이다.
그는 "희귀질환은 대부분 유전병이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들은 자신의 고통이 대물림되지 않을까 늘 걱정한다"며 "현재 우리나라 진료체계에서 의사의 5분 진료로는 유전상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단의 중심 사업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전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직후인 1967년 미국 위스콘신에 있는 유전학 권위자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유전학에 관심이 많은데 어떻게 공부하면 좋겠냐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도착한 답장에는 소아과 전문의가 된 다음 유전질환 분야를 공부하면 의사로서 유전학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겠다고 적혀 있었다. 확신을 얻은 그는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의대에서 1972년 소아과전문의 자격을 취득했고, 1975년에는 사이나이 의대 교수로 임명됐다. 또 1982년에는 임상유전학 전문의 자격도 얻어 1994년까지 27년간 미국에서 소아·유전학 분야를 연구했다.
그는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언어 문제 때문에 전화로 해도 될 일을 직접 병동에 내려가 확인하는 일이 많았다"며 "그때 직접 눈으로 보고 익힌 의술이 큰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1994년 아주대병원이 문을 열면서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국내 최초로 유전학클리닉을 개설했다. 이곳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연구·후진양성에 힘써온 그는 대한의학유전학회 회장과 아주대병원 유전질환 전문센터 센터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활동 속에서도 국내에서 유전상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데 고민이 많았다.
그는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유전상담사들이 활동해 현재는 그 수가 3000명에 이르고 일본 역시 100명 정도 활동하고 있다"며 "우리나라의 5분 진료 체계로는 유전상담이 어려운 데다 관련 법규도 없고, 수익도 나지 않아 시행하는 병원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희귀질환재단을 통해 유전상담을 할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가장 큰 목표를 두고 있다. 지난달 26일에는 아주대병원에서 재단 설립 후 처음으로 ''''유전성 희귀질환과 유전상담'''' 교육 강좌 및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지난 16일에는 경남 양산부산대병원에서도 세미나를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질병을 대물림하며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다문화 시대를 맞아 인종별로 다른 유전성 희귀질환에 대한 대비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21/20111121023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