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귀질환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현주 건양대 석좌교수(왼쪽)가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구 동부시립병원에서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을 상대로 유전상담을 하고 있다.
“질환이 점점 악화돼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결혼하면 아이에게 유전될 확률이 50%인데….”
자신이 앓고 있는 병과 현재 상태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던 대학생 이미소(가명·21·여)씨는 ‘유전’이라는 단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씨는 열네 살에 ‘돌연변이성 신경섬유종증’ 판정을 받았다. 7년이 지난 지금 이씨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결혼하면 유전병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공포다. 이야기를 듣던 한국희귀질환재단 김현주(건양대병원 석좌교수) 이사장이 입을 뗐다. 김 교수는 “50% 유전된다는 것은 반대로 50%가 유전 안 된다는 얘기”라며 “희귀질환은 미소씨 잘못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유전자검사를 통해 아이가 신경섬유종증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가면서 임신을 준비하면 유전 걱정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다독였다. 김 교수는 이씨 가계도를 그려가며 유전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지난 17일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위치한 동부시립병원 유전클리닉에서 만난 이씨와 김 교수의 대화는 70분간 이어졌다.
이씨는 “병원을 오래 다녔지만 진료 시간은 늘 5∼10분에 불과했다. 필요한 정보는 외국 사이트를 뒤져 알아내곤 했는데 처음부터 유전상담을 알았더라면 맘고생을 조금은 덜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희귀질환자와 그 가족들은 ‘대물림’이 가장 두렵다. 미혼자들은 결혼 자체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아이에게 자신의 병이 유전될까 불안해한다. 희귀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낳은 부모는 ‘나 때문에 아이가 고통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또 아이를 더 낳았을 때 같은 병을 가진 아이면 어쩌나 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삶을 짓누른다.
역시 희귀질환인 ‘듀센형 근이영양증’을 앓는 10대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모(50·여)씨도 그랬다. 엄씨 아들은 2001년 9월 아이가 생후 백일이 지났을 무렵 폐렴으로 입원했다 유전자검사를 통해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엄씨에겐 병력이 없었지만 ‘내가 물려준 게 아닐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병원은 가족들 중 병력이 있을 수 있다며 검사를 제안했지만, 차마 검사를 받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엄씨는 다시 임신을 했다. 엄씨는 여러 병원에 유전 가능성을 문의했다. 병원들로부터 ‘아들일 경우 50% 근육병 발병확률이 있고, 딸은 보인자(병을 유전시킬 가능성이 있는 자) 가능성이 50%’라는 답이 돌아왔다. 임신한 아이는 아들이었고, 엄씨는 중절을 선택해야 했다.
엄씨는 10년 만인 지난 2013년 유전상담과 유전진단검사를 통해 유전대물림이라는 무서운 굴레를 벗었다. 상담을 통해 아들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발견됐고, 엄씨는 정상인 것으로 판명됐다. 딸에겐 전혀 유전되지 않으며 엄씨의 자매와 조카들의 유전확률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엄씨는 “자세한 유전상담이 있었더라면 저에게 찾아온 건강한 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전 세계적으로 밝혀진 희귀질환은 7000여종이다. 희귀질환 80%는 유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준한 관리와 유전 상담·검사가 필요하지만 한국에는 희귀질환 환자가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전문가에 따라 13만∼50만명으로 추정치를 내놓을 뿐이다. 유전 여부를 자세히 설명하고 상담해준 유전상담사도 없다. 미국은 3400여명, 일본은 160여명의 유전상담사가 활동하고 있다.
유전상담사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자 질병관리본부는 연세대 손명세 교수팀에 연구용역을 줬다. 2013년 발표된 ‘국내 유전상담사 제도 운영모델 개발’ 보고서를 보면 당장 희귀난치성질환자를 위해 필요한 상담사 수는 48∼78명이다. 건강보험공단 산정특례로 등록된 희귀난치성질환자 73만7239명(2012년 10월 31일 기준) 중 유전질환자를 약 35만명으로 보고 이 중 80%인 28만명이 유전질환대상자라고 가정하고 추산한 결과다. 하지만 유전상담사 도입은 아직 요원하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19일 “희귀질환 유전상담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상담사의 자격요건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료계의 통일된 의견이 있어야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유전상담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빨리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은애 허경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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