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성 뇌질환 대물림 아들 아버지가 목졸라 죽인 비극
10년간 딸·손자 등 7명 사망
국내 5000종 희귀질환 유전자 조사와 상담 불충분
소수 弱者의 복지도 챙겨야"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열기가 채 식지 않은 7월 초, 조선일보 사회면 한쪽 칸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애달픈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희귀병을 앓는 아들을 아버지가 목 졸라 죽이고 자수했다는 내용이었다. 유전성 뇌질환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 김모(당시 59세)씨는 막내아들(27세)이 똑같은 질병으로 고생하자 그런 일을 저질렀다. ''부정(父情)의 비극''이었다. 막내아들은 유전성 희귀병을 앓는 남편과 자식을 동시에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에게 더는 짐이 되기 싫다며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단다. 어머니는 아들의 대소변을 거둬왔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생계를 맡아 꾸려왔다.
김씨 부부는 20대에 만나 결혼을 해서 첫 아들, 둘째 딸, 셋째 아들 등 자식 셋을 두었다. 남편 김씨에게 병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이 집안은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다 남편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점점 몸이 이상해지더니 나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어렸을 때는 증세가 나타나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병세가 심해지는 희귀 난치성 뇌질환인 ''소뇌(小腦) 위축성 실조증''이었다. 돌연변이 유전자로 인해 생기며, 소뇌가 오그라들어 하반신이 마비된다. 부모 중 한 명에 이 유전자가 있으면 자식들한테 그대로 옮겨간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그 몹쓸 유전자가 숨어 있었다.
강산이 한 번 변한 지금, 이 집안은 어떻게 됐을까. 희귀 유전병 연구를 하는 아주대 의대 김현주 명예교수가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다. 김 교수팀이 수소문 끝에 그 집안을 찾아가 본 결과, 아들을 희생시킨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실조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곧 아들을 따라갔다. 그 사이 둘째 딸에게도 같은 희귀병 증세가 나타났다. 돌연변이 유전자가 막내아들에 이어 둘째 딸한테도 발동한 것이다. 딸도 아버지에 이어 수년 전 세상을 떴다. 딸이 낳은 자식 두 명, 즉 김씨의 외손자 중 한 명은 4세 때 동일 희귀병으로 사망했고, 또 다른 한 아이는 현재 중증 장애인이 됐다. 돌연변이 유전병은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질병 발현(發現) 시기가 점점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 집안이 그런 경우였다.
''부정의 비극'' 사건 때는 아무 증세가 없던 첫째 아들에게도 이후 병마(病魔)가 나타났다. 그는 맹인이 됐고, 지체 장애인이 됐다. 그도 20대에는 아무런 증세가 없었기에 결혼해서 자식 둘을 낳았다. 하지만 그 자녀들 모두 조기 발병으로 이미 하늘나라로 갔다. 결국 김씨 집안에서 지난 10년 동안 유전성 희귀질환으로 3대(代)에 걸쳐 일곱명이 사망한 것이다. 참담한 시련의 주인공이 된 김씨의 부인 최씨는 실성한 사람처럼 "집안이 벼락을 맞은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가슴이 턱 막히는 이 비극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이는 희귀질환에 대한 유전자 조사와 유전병 예방 상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결과다. 김씨 집안 사람들은 처음 발병 당시에 병명(病名)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저 희한한 병이라는 말만 들었다. 진단명은 나중에야 정밀조사로 밝혀졌다. 그 병이 돌연변이 유전자의 횡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유전자를 조사해 사전에 실상을 파악하고, 유전병 상담을 거쳐 후세의 출생을 조절했다면 비극의 대물림은 없었을 것이다.
뼈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선천성 희귀질환으로 평생을 휠체어에서 생활해온 30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부부는 임신했고, 태아에게도 희귀질환이 나타날지 몰라 몹시 걱정했다. 이에 서울의 한 유명 대학병원에 문의한 결과, 확률이 절반이니 낙태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처방에 따르지 않았다. 유전병 전문 클리닉을 찾아가 태아 유전자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정밀조사 끝에 태아에게 돌연변이 유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이 부부의 아이는 건강하게 뛰놀며 부부의 꿈나무로 잘 자라고 있다.
국내에 각종 희귀질환은 5000여 종에 이르고, 환자가 수만 명이다. 희귀질환 유전자 연구와 유전병 상담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비극을 막고 희망을 심어줄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너무나 적다. 의학계나 제약계에서도 이 분야는 연구 성과를 내더라도 극히 소수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공공(公共)이 나서지 않으면 방치되기 쉬운 분야다. 다수(多數)를 위한 보편적 복지를 앞다투어 내세우는 요즘, 소수(少數)의 절대약자(弱者)를 위한 복지는 제대로 갖췄는지도 꼼꼼히 챙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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