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제도 미비로 진단·치료법 있어도 소용 없어…환자만 고통
한국희귀질환재단(이사장 김현주)의 주최로 지난 7월 21일 서울시 동부병원에서 개최된 ‘희귀질환 진단과 유전자 검사의 최신 동향’ 주제 워크숍에서 청중들은 희귀질환환자와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한 다큐멘터리를 숨죽여 지켜봤다.
미국에서 제작된 ‘미확진 희귀질환, 의료난민’이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현대문명의 첨단 의료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병명조차 제대로 진단받지 못한 채 희귀 난치병과 맞서 싸우며 마치 난민처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냈다.
“전 27개월 동안 오진을 받았어요. DIA부터 뇌졸중, 복합편두통, 심지어는 정신질환 이야기도 들었죠.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이 정신질환을 받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의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세요? 병명을 몰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모른다는 걸 인정해주세요”
◆ 정확한 진단조차 힘들어…희귀질환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 세계에 약 7000여종이 넘는 희귀질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귀질환은 난치성으로 다발성 선천성 기형에 의한 발육장애 및 지체장애, 선천적으로 청각 및 시각장애, 정신지체 등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출생 시에는 정상이나 성인이 되면서 보행 및 운동장애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 중도에 장애를 초래하기도 한다.
질환자체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 못하고 있고 치명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지어 일반 의료진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진단을 받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정확한 검사를 통해 조기진단과 유전상담으로 예방, 특수교육, 교육과 재활치료 등을 통해 장애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기진단과 유전상담으로 예방, 특수교육, 교육과 재활치료 등을 통해 장애를 최소화하고, 고위험군 가족들에게도 유선상담을 진행해 예방을 포함한 종합적 관리를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희귀질환은 대부분 돌연변이에 의해 가족 내에서 처음 발생하지만 질환에 따라 대물림되는 경우도 있다. 희귀질환의 특성(희소성, 다양성, 유전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특성 소수의 문제라기보다 돌연변이에 의해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여러 장애를 동반하기도 하기 때문에 국민건강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 | 김현주 한국희귀질환재단 이사장(사진)은 “조기진단과 가족 내의 재발과 대물림 예방, 의료, 복지 등 포괄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희귀질환의 80%는 유전질환이고 동일 질환이라도 환자들 간 발병 양상과 치료 반응에서 다양성 및 이질성이 있으며 환자수가 매우 적어 감별 진단법이 아예 없거나 전문가 부족으로 오진율이 높고 확진이 되더라도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 국내 희귀질환 실태…최신기법 검사도 의약품 공급도 힘들어
희귀질환의 정의는 나라마다 다른데 우리나라는 해당 의약품 분류를 위해 2만 명 이하의 유병률 질환을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정하고 있다. 희귀질병에 대한 역학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유병율 통계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아직 없는 상태이다.
유전의학 분야 국내 최고 전문가인 김현주 한국희귀질환재단 이사장은 “이런 이유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이미 다른 병원 4-5곳은 이미 거쳐 온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희귀질환 환자들이 많은 병원을 돌며 각종 검사를 받아도 정확한 진단조차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최근 유전체 분석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여러 유전자 이상을 한꺼번에 빠르게 검사할 수 있는 검사법들이 개발됐다. 이를 통해 희귀질환 진단율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진단 비용까지 줄일 수 있다.
이 중 마이크로어레이검사는 이미 해외에서 활성화된 염색체 정밀 분석법으로 주로 발달장애, 정신지체, 선천성 기형 등을 보이는 경우에 시행하면 약 20%-30%에서 기존 염색체 검사로 진단하지 못한 유전질환을 진단할 수 있다.
또한 엑솜시퀀싱은 전체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한꺼번에 분석하며 이를 통해 약 10-30%의 희귀질환의 진단이 가능한 검사기법이다.
김현주 이사장은 “최신기법을 통해 국내 희귀질환 환자 중 적어도 30%-40%는 정확한 진단과 이를 통한 적절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의료제도 미비로 적절한 진단·치료법 있어도 쓸 수 없는 현실
하지만 문제는 마이크로어레이검사와 엑솜시퀀싱과 같은 최신기술들을 우리나라 희귀질환 환자들에게는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희귀환자들에게 이런 최신검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급여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 의료제도의 미비 때문에 적절한 진단치료법이 있어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주 이사장은 “국내 희귀질환의 30-40% 정도는 최신기술에 의한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한데도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비급여로 허가조차 되지 않아 환자와 가족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에 한국희귀질환재단에서는 현재 (주)녹십자지놈에서 제공하는 마이크로어레이검사와 엑솜시퀀싱 검사로 많은 환자들을 높은 진단율로 확진하고 정확한 진단에 근거해 적절한 유전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희귀질환 예방과 희귀의약품 연구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검사비용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 상태로 현재 100만원 미만으로 마이크로어레이검사가 가능하며 엑솜시퀀싱도 200만원 정도 수준에서 검사가 가능하다.
김현주 이사장은 “우선 비급여로라도 검사를 허용해 진단할 수 있는 환자는 진단해야 한다”면서 “그래야 희귀질환환자들이 정확한 진단조차 받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 떠도는 ‘의료난민’ 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 희귀질환 환자들이 어렵사리 진단을 받아도 높은 약값이나 의약품 공급이 불안정한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문제도 매우 크다.
최근 국회에서 개최된 희귀난치성질환 보장성 정책 세미나에서 김호진 국립암센터 신경과 교수(사진)는 “치료제가 국내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약값 때문에 치료 받지 못하는 희귀난치성질환 환자들도 매우 많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희귀의약품은 환자 수가 적고 수익성이 낮으며 임상시험이 어려워 개발이 어렵고 그나마 개발된 희귀의약품 대부분도 해외에서 개발·수입되는 제품으로 독점 공급되기 때문에 공급이 불안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희귀질환 환자들은 의료적 어려움과 경제적 어려움, 심리사회적 어려움이라는 3중고를 겪고 있는 실정이다.
김호진 교수는 “국내 허가된 희귀의약품 중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비율이 40%에 달한다”면서 “공급관리와 보장성 강화, 국내 신약개발 지원 등 다양한 정부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희귀질환 보장성강화를 위해 “희귀난치성질환 신약 보험급여 평가 및 과정에 있어서 의료계 입장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정책을 제안했다.
김호진 교수는 또 “일부 환자에 한해서라도 비급여 약제를 지원하고 희귀질환 치료제 공급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체계적인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좀 더 빠른 급여 결정을 위한 유연한 제도를 마련하는 등의 조치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싸도 너무 싼 건강보험 수가, 진단에 필요한 시간조차 허락 안해
사실 국내 희귀질환 환자들이 정확에게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불가능한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싸도 너무 싼 우리나라 건강보험 수가가 있다.
김 이사장은 “희귀질환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과거력과 가족력을 자세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문진에만 적어도 30분 이상 걸리지만 우리나라는 수가가 너무 낮아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한 환자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지적했다.
초저수가로 인해 의사 한명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을 진료해야 수익이 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김현주 이사장은 “희귀질환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그 구체적인 해결방안으로 “희귀질환에 적용되는 건강보험 수가를 지금보다 3배 정도는 올려야 더 자세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우리나라도 ‘유전상담전문가’ 제도화 필요
의사가 희귀질환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질환자체가 매우 드물고 환자의 개인 과거력과 가족력을 자세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수가 문제로 인해 의사 1인당 환자수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현재 우리나라 의료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미국과 일본 등의 선진국처럼 ‘유전상담전문가’ 제도를 적극 도입해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직종인 유전상담전문가는 유전력이 있는 희귀질환 환자들의 개인력과 가족력 등 유전가계도를 정확히 파악해 조기 치료 및 질환 관리를 돕는 전문 상담가를 말한다.
의사는 아니지만 간호학과 생명공학 등 관련 전공자로 전문적인 유전상담을 진행해 의사와 환자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지난 1970년부터 도입, 활성화 돼 현재는 약 3700명의 유전전문상담가가 미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ABGC(American Board of Genetic Counseling 미국 유전 상담 학회) 인증을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는 오는 9월 아주대학교에서 유전상담 전문석사 프로그램이 최초로 개설될 예정이다.
김현주 이사장은 유전전문상담가에 대해 “미국에서는 고연봉을 받고 있는 선호 직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현 고용노동부에서 선정한 일자리창출 500여종 중 수위 안에 들을 정도로 유망직종으로 꼽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유전상담사 제도를 도입, 활성화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트레이닝시켜 배출한다면 의사와 한팀이 되어 유전질환 진단 및 치료에 정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한국희귀질환재단은 지난 16년간 활동을 펼쳐온 ‘한국희귀질환연맹’을 모체로 설립되어 지난 2011년 보건복지부 인가를 받은 공익법인이다. 국내 희귀질환환자들의 대모로 불리는 김현주 이사장을 중심으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유전상담서비스지원,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R&D 지원, 진단사업 지원, 자원봉사 지원, 특수 보육 프로그램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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